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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사회의 역사교육; 영국의 다문화주의 교육과 역사교육. 논문요약 대학원 예시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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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락. (2012). 다문화사회의 역사교육; 영국의 다문화주의 교육과 역사교육. 역사교육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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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로서의 영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켈트족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영국에 와서 300년 이상 지배했다. 한해 중반에 앵글스, 색슨, 류튼족과 같은 게르만 인이 영국의 지배적인 거주자가 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노르만인들이 지배 곤충으로 흘러들어갔다. 사회성 변화의 핵심 요인은 영국 사회의 다문화성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같은 피부색과 기독교 문화를 공유했다.영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것은 20세기 중반이었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는 아프리카인과 인디언이 유입되었는데, 이 유입은 매우 작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2차 세계 대전 무렵 영국은 노동력 부족을 일으키기 위해 식민지에서 많은 노동자를 수입했다.

 

주장입증에 대한 통계적연구와 근거제시

이 상황은 영국이 이민을 규제하기 위해 1962년 영연방 이민법을 제정할 때까지 계속된 현상이었다.최근 발표된 2009년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구 통계는 소수 민족의 비율이 매우 급격히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백인 인구는 2001660만 명에 비해 거의 변화가 없으며 2009910만 명의 비 백인 인구가 영국 전체 5400만 명 중 6분의 1에 해당한다. 영국 전체 인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6명 중 1명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영국 사회는 다문화 역사 회의의 전형이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문화적 동화였는데, 이는 소수 민족을 백인 문화로 문화적 동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이민자들이 민족적 특성과 문화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964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동화가 아닌 다문화주의로 정책 입장을 바꿨다. 1966년 노동당 내무장관 로이 젠킨스는 통합을 동화가 아닌 상호 관용의 분위기에서 다양한 문화와 동등한 기회로 규정한다며 노동당의 다문화 정책을 표현했다. 그들은 다문화주의가 아프리카인들을 더 나은 아프리카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을 보였다.최근에 발표된 영국과 웨일즈의 2009년 인구 통계는 소수 민족의 비율이 매우 급격히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백인 인구는 2001660만 명에 비해 거의 변화가 없으며 2009910만 명의 비 백인 인구가 영국 전체 5400만 명 중 6분의 1에 해당한다. 영국 전체 인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6명 중 1명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영국 사회는 다문화 역사 회의의 전형이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문화적 동화 였는데, 이는 소수 민족을 백인 문화로 문화적 동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이민자들이 민족적 특성과 문화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964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동화가 아닌 다문화주의로 정책 기조를 바꿨다.1966년 노동당 내무장관 로이 젠킨스는 동화가 아닌 상호 관용의 분위기 속에서 통합을 다양한 문화와 동등한 기회로 규정한다며 노동당의 다문화 정책을 내비쳤다. 그들은 다문화주의가 아프리카인들을 더 나은 아프리카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 13-16 프로젝터는 리즈 대학교가 개발한 역사 및 교육과정 및 교육 자료로, 학생과 영국 역사의 직접적인 역사탐색보다는 다른 지역의 역사를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권력을 잡기 시작한 보수주의자들은 '역사 13-16 프로젝터'를 불편한 시각으로 보았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에는 유럽 전역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이 두드러졌다. 1979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에서는 여당이 보수당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애국심, 권위, 건전성, 개인적 책임 등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로 돌아가겠다는 수상의 반응에 근거해 당시의 다문화적 특성을 지닌 종교교육과 역사교육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들은 기독교 중심의 종교교육과 백인 중심의 역사교육이 강조되어 국민통합과 애국심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한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역사 교육과정 초안 과정에서 많은 역사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정부가 임명한 역사교과서 초안(HWG)도 정부의 요구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많은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1990년 역사 교육과정 초안의 최종 보고서는 매우 훼손되었다. 이 최종 보고서는 역사 13-16 프로젝터보다는 다문화주의의 관점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었지만, 교육전문가의 입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보고서는 보수파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이른바 '역사적 논란'이 일어났다. 19905월 옥스퍼드대 러스킨대학 역사토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민족 정체성을 강조했고, 급진주의자들은 외국인 혐오증의 출현을 두려워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논쟁은 역사교육에 대한 합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1991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역사 커리큘럼은 정부의 간섭으로 인해 다문화주의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식 역사 교육과정은 영어사 50%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영어사는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의 과정이 아니라 백인 원주민의 역사이며, 정치·문화적 성과가 대단하다.1991년 발간된 역사과 교육과정 해설에서는 학생들이 역사과 교육과정을 통해 과거의 문화다양성을 배우고 다른 문화와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실제 교육과정은 다문화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 역사교육에서 다문화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형태는 영국사보다 세계사를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영국사 그 자체를 다문화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문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포함(Inclusion)’의 원칙이다 이는 모든 수업에서 인종적 소수 의 학생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영국사나 유럽사 수업에서 가장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계사 수업과는 달리 영국사나 유럽사 수업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카리브해 출신 소수민족 아동들이 이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모두 영국사는 백인 주류의 역사라고 인식해왔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보수주의자는 백인기독교적 가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영국사의 확대를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문화적 다양성 을 위해 영국사의 축소를 강조해왔다. 다시 말해, 진보주의자들조차 영국 사에서 포함의 원칙은 근본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입장은 영국사 그 자체도 백인주류의 역사만은 아니며, 다문화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주의 교육을 강조하는 일 부 역사교육자들은 영국사에서 백인외의 인종이 관련되어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이 같은 흐름은 20세기 말까지 영국사에서 흑인 및 아시아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사실, 영국 사회에서 혹의 존재는 1세기 로마 통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임스 웨이빙은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에서 추방된 기록도 혹의 존재를 반증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로스베노르가 주장했듯이 영국 역사는 단순한 백인의 역사 이상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영적 역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소수 학생들에게 영국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조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자부심과 포용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긍정적인 기여만을 다루는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수민족이 긍정적인 기여를 하든 부정적인 영적 형태를 하든 역사적 의의가 있다면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편향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 이러한 접근방식은 전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인 인물을 찾고 배우는 것은 역사라기 보다는 전기에 가깝다.

 

다문화주의 역사교육의 적용과 문제점들에 대한 견해

 

많은 역사교육 전문가들은 다문화 역사교육이 단순히 역사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교육의 문제, 즉 교실교육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 역사 교육의 이 부분은 무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교사들은 다문화 역사 교육을 역사 교육 정책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그 영역이 아니다. 역사교육의 과정은 논쟁적이고 객관적이며, 개별적인 사실과 의견이어야 하며, 편견과 선전을 구별하고, 학업성취도를 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역효과를 내지 않고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실교육공학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영국 교실에서 다문화 역사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역사 교육자들의 주장과 교사들의 책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학생들의 오해와 편견은 영국의 다문화 역사교육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개념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소수 학생, 특히 어려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교정하고 소수 학생에게 포용감을 줄 수 있는 역사적 사고 능력의 유용한 부분이다.

인종, 문화, 종교 다문화는 2008년 역사교육에서 배워야 할 6가지 주요 개념 중 하나이다.다양성이라는 용어는 매튜 브래드쇼가 지적한 바와 같이 비영국 역사 또는 다양한 민족, 문화, 종교의 역사 또는 소외된 역사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2000년대에 영국은 역사 교육의 진전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을 시행했다. 역사 커리큘럼은 역사 역사의 하나로 다양성을 제시했으며, 역사가들은 영국 역사에서 소수 민족의 존재를 확인했다. 영국 역사를 다양한 민족의 역사로 인식하는 경힝은 가장 놀라운 접근법 중 하나이다. 다양한 실 수업을 통해 카리브해 출신의 많은 학생들이 역사 선생님을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학생들은 역사 과목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지만 역사 수업의 학습 내용과 교사와의 관계를 탓하지는 않는다.하지만 영국의 역사 교육은 다문화주의 측면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다.

 

본 논문은 영국의 역사교육에서 다문화주의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영국은 1960년대 이후 전형적인 다문화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의 인종 소수 민족에 대한 초기 정책은 1985년 스완 보고서가 발표되기 전까지 동화 중 하나였으며, 이는 영국의 인종 간의 교육적 성취에 심각한 인종 차별과 불평등을 보고했다. 1989년 도입된 초중등국립학교의 역사교과서는 국가사보다 세계사를 위한 공간을 더 많이 허용함으로써 다문화주의를 지지한 사람들과 학교에서 국가사를 강조하여 민족주의를 꾀하고자 했던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타협의 결과였음을 알게 된다. 2008년에는 다문화적 용어로 된 고급 역사 교육과정이 제작되었다. 2008년 역사 교육과정은 문화, 민족, 종교의 다양성을 6가지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열거했다. 이는 영국의 다문화 역사교육이 역사교육과정에 관한 한 훨씬 발전했음을 시사한다. 영국에서의 역사 교육의 또 다른 측면은 백인 원주민에서 역사 교과서에 소수 민족을 포함시키는 국가 역사의 내용이 극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국 사회가 동질적이기보다는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국 역사에서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많은 역사 교육자들은 또한 역사 교실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영국 역사의 다양성을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다문화 역사 교육이 효율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논문에서 보는 본인의 견해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많은 식민지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주로 아프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에서 흐르기 시작했으며, 지금쯤 영국에서만 비 백인의 수가 약 1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1960년대 이전의 다문화 사회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문화적 동화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동화주의에서 다문화주의로 정책 변화가 발생하여 교육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영국의 다문화주의 교육은 초보적이었다. 1985년 백조 보고서를 통해 다문화 교육의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문화 교육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역사교육의 변화는 이것으로 시작되지만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는 역사교육이 다문화주의에서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 정부의 노력으로 역사교육에서 다문화주의가 확립된 것은 2008년이 되어서였다. 역사교육과정에서 학습할 주요 학습개념에 문화, 인종, 종교의 다양성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위한 추가적인 설명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학생들은 문화, 민족, 종교의 다양성, 인종평등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다양성은 문화, 인종, 지역, 언어,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종교적 차이에 기인한 집단 내외부에 존재한다. 문화적 이해는 그것이 광범위한 그룹, 개인, 소수와 다수, 유럽인과 비유럽인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같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민족과 사회는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번역, 의견, 해석을 가질 수 있다.2008년 역사교육과정을 통해 역사사상능력의 하나로 다양성을 강조하고 영국사에 대한 다문화적 이해, 즉 영국사 자체를 다문화로 보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정부의 통치로 역사 커리큘럼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재개되었다. 과거의 문화적 단결을 강조하는 역사교육이 다문화주의의 방향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이 크게 줄어들었다.그러나 역사학계의 강한 반대와 일선 교사들의 거부로 인해 이러한 시도가 막히고 오히려 다문화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영국의 다문화사 교육 정책은 여당의 성향에 따라 계속 발전하고 후퇴할 것이지만 영국의 다문화사 교육에 대한 논쟁은 잡지 기사처럼 정치인들이 결정할 것이며, 성공이나 실패는 앞으로 교실을 이끌고 있는 교사들의 자질과 태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시사점과 적용포인트에 대한 견해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1990년대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을 통해 경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외국인 유입의 수가 증가하였다. 과거 한국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서 한국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한국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주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다문화가구 수는 316,067가구, 가구수는 963,174가구, 다문화가구 100만가구이다. 이 중 교육연령인 09세 인구는 187024, 1019, 74,874명으로 약 27%에 이른다. 주변 초등학교를 통과할 때 학교에 다니는 다문화 가정을 자주 보게 되고, 이제는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도 다문화 아동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문화 가정의 수가 증가한 것은 어제가 아니며, 다문화 가정 중 교육 연령에 해당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데도 다문화 교육이 역사 수업에 반영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교실에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 비율이 아직 크지 않다.그러나 다문화 가정의 수는 계속 증가할 것이며, 우리 사회의 다문화 가정 아동과 교육의 비율은 증가할 것이다.이 상황에서 일반 가정과 다문화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이 나라의 일원이며 주인이라는 역사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

다문화교육의 첫 단계는 우리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이러한 문화와 삶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양한 문화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인식하고, 지구상에서 어떤 다양성과 보편적 문화가 발전해 왔는지를 이해한다. 다문화교육 3단계는 특정 문화집단을 보기 전에 알지 못했던 편견적 시선이 있었는지,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자신의 관점 중 일부가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네 번째 단계는 학생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행동양식은 그 방법을 공유하는 집단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규범이며, 내가 속한 집단의 문화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문화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 5단계에서는 각 집단의 맥락과 상황에서 한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로 모든 집단의 문화활동을 존중하고, 다른 집단의 문화활동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여 상호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초등학교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제시한 다문화교육의 목표를 바탕으로 초등생을 위한 극화 수업안등이 교사에게는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극화 수업은 개인의 상황과 조건에서 행동 결정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이 수업은 학생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증진시키고 역사적 지식을 함양하는 목표 외에 연기의 표현 스타일로부터 독특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적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설명이 중요하지만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 수업은 지루할 수 있고 학생들의 흥미를 줄일 수 있다. 극화 수업을 진행한다면 학생들은 역사 내용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고, 학생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역사적 상상력과 사고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다문화 역사교육에서 다문화가정 자녀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과 같은 계층이다. 역할극은 단순히 이론적 강의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극화를 예를들어 설명해보면 개화기의 사례를 볼 수 있다.

개화기에는 많은 신문이 들어오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이 시기는 다양한 문화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다문화 역사교육에 적합한 단위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은 한국 관리들, 미국 기자들, 일본 군인들, 청 상인들이다. 역할극의 내용은 한국 관계자와 미국 기자, 일본군, 청 상인들이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산에서 경부선으로 서울로 여행하는 내용이다. 각국의 캐릭터가 되어 역할이 되고,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다른 학생들도 각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역할극 참여자를 설정하고. 미리 소집단을 구성하고 각 소그룹에 각 나라의 의미와 표현, 국가문화를 미리 조사하게 한 후 각 분야별로 4명을 선발해 각국의 캐릭터 역할을 맡게 할수도 있다. 또한 역할극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본이 필요하다. 내가 설정한 역할극의 주제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단원과 관련된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로, 대본은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가게 하며. 부수적인 소품은 각 소그룹이 준비하거나 학생들이 준비하지 못할 경우 교사가 도와줄수 있는 방식으로 다문화사회역사수업준비를 이끌어나갈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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